12. 8. 28.

(쉽게 쓴) UX란? 그리고 UI와 UX의 차이 user interface & user experience UI 가벼운 이야기


앞의 세 글에서는 다소 논리적으로 기존 개념에 대해 반대하는 부분을 넣다 보니 내용이 어려워진 듯 하다. 그래서 최대한 쉽게 설명해보려고 한다.

UX란? 사용자 경험의 핵심은 "느낌, 태도, 행동"
UI는 인터페이스, 즉 정보기기나 소프트웨어의 화면 등 사람과 접하는 면을 말한다. 반면 UX는 경험이다. 경험은 무엇인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느낌, 태도, 행동"을 말한다. 경험을 설계한다는 말은 사용자의 "느낌, 태도, 행동"을 설계한다는 말이다.

좋은 건강 관리 소프트웨어를 써 보면 느낌이 다르고, 건강 관리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고, 건강 관리하는 내 행동을 변화시킨다.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제품을 사용할 사람의 "느낌, 태도, 행동"을 설계한다면 그는 UX 디자이너이다. UI는 그 일부분(도구)일 수 있다.
여기서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개성(personality 혹은 character 혹은 concept)을 의미한다. 특유의 느낌이 일관되게 있는 소프트웨어는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Path라는 소프트웨어는 인터페이스에서 특유의 자유자재스런 느낌을 제공하면서도, 공유할 대상을 제약하여 결과적으로 사진을 공유하는 행동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이 개성은 모든 것이 다 있는 보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빠진 것에서 나온다. UI에서는 누구에게나 편리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소프트웨어, 즉 보편성을 지향했다면, UX는 기능의 제거나 제약에 따른 개성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 특정한 사람만 만족시키는 주관성을 지향한다. 아이폰을 사용하면서 만족스러웠다면, 복잡한 기능을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만 가장 단순하게 제공하면서도 미적인 디테일은 엄청나게 높인 점을 좋아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바로 이 기능 제약 때문에 아이폰을 답답하게 생각한다.

사용자의 정황과 목표를 공감해야 개성을 만든다
필요한 기능을 몽땅 제공하는게 아니라, 일부만 제공하면서도 성공하려면, 첫째 사용자의 환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용자의 주변을 살펴야 하므로 설치, 포장, 마케팅이나 브랜드 이미지도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을 사용하는 정황(context)에 대한 이해이다. 그 정황을 잘 이해하려면, 디테일이 쉽게 무시되는 양적 사고보다는 개별 정황의 차이가 잘 드러나는 질적 사고가 중요하다. UI에서는 과학적 엄밀성을 위하여 정량 조사를 중시했다면, UX에서는 정성 조사를 중시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둘째 사용자의 목표에 대해 깊은 공감이 필요하다. UI에서는 보편적 인간을 모델로 '분석'했다면, UX에서는 특정 사용자를 모델로 '공감'한다. 개별 데이터에 대한 분석 결과나 스펙으로 제품 전체가 일관된 느낌을 갖도록 설계하는 건 수십 명이 개발에 참여하는 현대의 환경에서는 불가능하다. 전체 팀이 특정 사용자에 대해 완전히 일치된 공감을 하고 있을 때 작은 디테일에서도 개별 설계자 스스로 판단하여 일관된 제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다. 조사 자료가 없는 빈 영역도 사용자에 대한 공감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특정 사용자가 그 회사 사장인 경우는 자연스럽게 이것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공감 도구'가 필요하다. 직원들이 제품을 개발하면서, 이걸 이렇게 만들면 사장이 화를 내겠지, 저렇게 만들면 사장이 좋아하겠지가 예측이 되는 회사라면 수백 명이 개발해도 모든 부분이 단일한 느낌을 갖는(coherent) 제품이 나올 수 있다. 그런 훌륭한 사장이 없다면 공감의 대상이 될 사용자의 모습을 퍼소나(Persona)로 만들어 놓고 모두가 같이 공감하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특정 사용자의 상황과 목표에 총체적으로 공감하여 설계하고 그것을 제품의 모든 인터페이스에서 일관되게 구현하면, 자연스럽게 소프트웨어/제품에는 특유의 개성이 생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느낀다". 또 자연히 그걸 싫어하는 사람도 생긴다. 물론 그 성격이 애플처럼 회사부터 제품, 가게까지 일관될 수도 있겠으나 제품만에서도 '경험'은 형성된다.

UI-UX 차이는 사고 방식의 차이
물론, UI 수준에서도 할 수는 있겠으나, 사용자의 정황/목표에 공감하여 설계하면 훨씬 더 쉽게 사용자들의 '경험'을 설계할 수 있고, 사용자들의 '느낌, 태도,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이를 위한 다양한 용어, 도구, 아이디어들이 모두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이라는 같은 시기에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UI-UX차이는 사고 방식의 차이 아닐까?  

노먼(경험), 쿠퍼(Goal Directed Design), 홀츠블랫(Contextual Design), IDEO(Design Thinking), 파인(경험 경제) 등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동시대에 같은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생산자 주도 사회에서, 일부 선진국들이 급격하게 새로운 소비자 주도의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많은 회사들이 양적 사고보다 질적 사고, 보편적 인간에 대한 분석 도구보다 주관적 인간에 대한 공감 도구, 통계적 신뢰성보다 전략적 타당성에 의한 의사 결정으로 관심이 옮겨간 것 같다. 그래서 UI와 UX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사용자를 바라보는 '사고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결론
필자의 생각으로 UX가 UI와 다른 점은

UI는 인터페이스, 즉 정보기기나 소프트웨어의 화면 등 사람과 접하는 면을 설계하는 일이다.
반면 UX(사용자 경험)란 특정 정황과 목표를 갖는, 정보기기/서비스 사용자의 "느낌,태도,행동"을 말한다.

사용자 경험 설계를 위해서는 "정황과 목표 이해"를 바탕으로 총체적 인간에 대한 공감이 필수이다.

UI-UX의 차이는, 인간을 바라보는 사고 방식의 차이이다. 양적 사고, 공감 도구, 전략적 타당성이 중요하다. 흔히 사람들은 UI와 UX의 차이에서 I와 X의 차이만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U와 U의 차이다. 사용자를 바라보는 사고 방식의 차이가 UX를 만들었다. UI에서 U가 보편적 인간을 모델로 한 분석 대상이었다면, UX에서 U는 주관적 인간을 모델로 한 공감 대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상을 정보 기기와 정보 서비스로 한정한 것에 대해 반대가 있을지 모르겠다. 디자인계는 항상 자신이 경영의 중심에 서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 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며 범위를 넓히려고 했다. 디자인 경영, UX, Design Thinking, Service Design 등이 모두 그 역할을 한 용어들이다. UX디자인이여, "디자인계의 사업 확장 욕망 충족"이라는 무거운 짐은 이제 서비스 디자인에게 물려주고, 자기 본연의 목적으로 범위를 좁힐 때가 되었다. 그 동안 수고했다.

1. HCI 개론(김진우)에서는 UI-UX차이를 주관성, 총체성, 정황성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이 글은 Tech It에도 실린 글입니다. 


출처 : http://story.pxd.co.kr/

12. 8. 8.

"안드로이드용 악성앱 2만5천종 발견"

글로벌 보안업체 트렌드마이크로 분석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전 세계적으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악성 애플리케이션(앱)도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9일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에 따르면 글로벌 보안업체인 트렌드마이크로는 '2분기 정보보호 동향' 보고서에서 올해 2분기에 1만9천개의 안드로이드용 악성 앱이 추가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현재까지 파악된 안드로이드용 악성 앱의 수는 2만5천개를 넘었다.

특히 4월 한달간에만 1만개가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악성 앱의 숫자는 지난해 4분기까지만 해도 1천개 수준이었으나 올해 1분기 6천개로 늘어났으며 2분기 다시 2만5천개로 불어났다. 이는 트렌드마이크로가 애초 예상한 1만1천개(누적 기준)를 크게 웃돈다.

트렌드마이크로는 이에 따라 예상치를 수정하고 연말까지 악성 안드로이드 앱의 수가 12만9천개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악성앱의 종류를 보면 사용자의 승인 없이 유료인 프리미엄 서비스를 이용하게 만드는 '프리미엄 서비스 어뷰저'가 48%로 가장 많았다.

사용자도 모르게 설치돼 지속적으로 상업광고가 뜨게 하는 '애드웨어'(22%)와 사용자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특정 정보를 훔쳐내 명령자에게 보내는 '데이터 스틸러'(21%)도 흔했다.

스마트폰용 애드웨어는 2분기에 새롭게 발견됐으나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반면 안드로이드용 단말기의 보안 소프트웨어 도입률은 20% 수준에 그쳐 보안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트렌드마이크로는 "앱이야말로 휴대전화에 저장된 정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라며 "앱을 내려받기 전 주의하고 모바일기기도 데스크톱 PC처럼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12. 8. 3.

디자이너의 자리

디자이너의 자리

글. 오창섭

<America's Dream>(1996)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3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인 ‘Long Black Song’의 배경은 1938년 미국 알라바마의 한 시골 마을이다.
데 니 글로버(Danny Glover)가 연기한 주인공 사이라스(Silas)는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가난한 흑인 농부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다. 어느 날 사이라스는 옥수수를 팔기 위해 읍내로 나간다. 옥수수를 팔고 받은 돈으로 그는 아내에게 줄 반지를 구입하려고 한다. 이것을 보고 있던 가게 주인이 말한다. “사이라스! 내가 보기에 자네 아내는 좀 더 유용한 것을 좋아할 것 같아. 저기 있는 빨래판 같은 거 말이야. 그녀에게 보석을 사주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야.” 이렇게 말하는 가게 주인은 인종 차별주의에 물든 백인이었다. 그의 말에 사이라스는 분노하며 다음과 같이 답한다. “사람은 때때로 필요한 것보다 원하는 것을 소유해야 합니다.”

‘필 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가게 주인은 빨래판을 ‘필요한 것’의 사례로 이야기하였다. 빨래판은 빨래를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물이다. 우리가 옷을 입고 생활하는 이상 빨래라는 활동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도와주는 사물 역시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필요한 것’은 이렇게 도구적 차원에서, 그리고 유용함과 관계에서 정의되는 것이다.

반 면 ‘원하는 것’은 ‘필요한 것’과 다른 맥락에서 정의된다. 영화에서 반지는 ‘필요한 것’과 대비를 이루며 ‘원하는 것’을 대표하는 사물로 등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반지는 빨래를 도와주지 못한다. 설거지를 도와주지도 못하고, 궂은 날씨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반지와 같은 것을 원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필요의 맥락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들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 공동체, 기억, 믿음 등과 같은 것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욕망하는 대상이 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원하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반지가 ‘원하는 것’의 목록에 포함되었던 것은 아내와 남편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존재하고, 반지를 주고받는 것이 문화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서로의 관계를 확인하고, 사랑을 확인받고자 하는 욕망이 그것을 ‘원하는 것’의 목록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보다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가게 주인은 반지를 구입하겠다는 사이라스에게 왜 빨래판과 같은 ‘필요한 것’을 구입하라고 했을까? 그리고 가게 주인의 말에 사이라스는 왜 분노했던 것일까? 우리는 가게 주인의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 사실은 고유의 자리를 지정하고 확인하는 명령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그는 사이라스가 있어야 할 자리, 그의 가족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인간적 삶이 있는 곳이 아니라 기계적 노동이 반복되는 자리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반지를 통해 사랑을 주고받으며 행복을 느끼는 자리가 아니라, 쪼그리고 앉아 빨래와 씨름하며 끊임없이 노동하는 자리 말이다. 가게 주인의 말은 또한 발화주체인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쪼그리고 앉아 빨래와 씨름하며 끊임없이 노동하는 자리가 아니라, 반지를 주고받으며 사랑과 행복을 느끼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통보하는 것이다. 사이라스의 자리를 노동의 자리로 규정하고 있던 가게 주인에게 반지를 구입하려는 행동은 불편한 것이었다. 가게 주인에게 사이라스의 행동은 경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려는 도전적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게 주인이 그런 말을 한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경계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가게 주인이라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더 나아가 뭐 그런 것을 묻느냐고,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 만들어진 것이다. 경계가 존재해야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이들에 의해서 말이다. 경계를 만든 이들은 경계의 벽이 공고히 유지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언제나 “그곳이 너의 자리야. 그곳을 벗어나는 것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속삭인다.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의 외부에 상대를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함과 이득을 확인받으려는 움직임은 더 이상 영화 속 가상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다양한 형태의 자리를 규정하는 경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의 자리와 피지배자의 자리, 전문가의 자리와 아마추어의 자리,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자리 등등. 각각의 자리는 그 자리에서 취해야하는 태도와 행동들이 어떤 것인지, 그 자리에서 꾸어야 하는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오늘날 디자이너들은 어떤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을까? 그곳은 어떤 태도와 행위들을 요구하고, 어떤 꿈이 허용되는 자리일까? 그리고 어떤 태도와 행위가 금지되고, 어떤 꿈이 거부되는 자리일까? 나는 우리 디자이너들이 활동하는 곳이 다음과 같은 자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소비자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만들 매력적인 상품을 디자인하는 일이 디자이너의 고유하고 유일한 역할이라고 정의하는 자리, ‘시민’이나 ‘소통’과 같은 그럴듯한 수사로 사적인 의도를 가리면서 화려한 볼거리들을 연출해내는 것을 디자이너의,새로운 역할이라고 이야기하는 자리,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면서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그것을 감수하는 것을 디자이너의 당연한 미덕인 것처럼 규정하는 자리…


출처: 지콜론

[독후감] 확장된 마음(The Extended Mind)

 <Analysis>라는 옥스포드 철학 저널이 있다고 합니다. 1998년에 이 저널에 <확장된 마음(The Extended Mind)>이라는 글 실렸는데요, 체화된 인지 및 능동적 외재주의(active externalism) 등과 관련된 여러 논의들을 촉발시킨 글이라고 합니다.

요즘 읽고 있는 <Supersizing the Mind>라는 책의 부록에 전문이 실려 있어서 읽고 간략히 요약하였습니다. 전에 읽었던 Alva Noe의 <뇌과학의 함정>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1. 도입(Introduction)
" 마음이 끝나고 세상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가지 흔한 답은 1) 피부와 두개골 안에 있는 것은 마음이고 그 밖에 있는 것은 세상이라는 관점과 2) 마음이 꼭 머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외재주의(externalism) 관점이 있습니다. 외재주의 관점에 의하면 마음의 일부가 몸 밖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여기에서 "일부"란 구체적인 철학적 입장에 다양한데, 예를 들어 <의미론적 외재주의(semantic externalism)>는 단어의 의미가 사람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저 자는 이 두 가지 관점이 아니라 능동적 외재주의(active externalism)라는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능동적 외재주의에서는 인지 과정의 일부가 몸 외부(즉 환경)에 있을 뿐 아니라 환경의 역할이 몸 내부의 능동적 인지 과정에 대하여 단순히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환경 그 자체도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인지 과정이 몸 밖에 외재되어 있는데 그냥 있는게 아니라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라고 해서 능동적 외재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죠.

 
2. 확장된 인지(Extended Cognition)

컴퓨터 화면에 어떤 도형과 도형을 꽂을 수 있는 소켓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 도형이 소켓에 맞는지 안맞는지를 맞추어야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냥 평범한 심적 회전(mental rotation) 과제죠. 피험자는 머리 속으로 도형을 이리저리 회전시키면서 소켓에 맞출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저자는 이 실험의 두 가지 변형을 제시합니다. 첫번째 변형에는 화면 속의 도형을 실제로 회전시켜볼 수 있는 버튼이 제시됩니다. 이제 피험자는 머리 속으로 상상을 하지 않고 단순히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도형을 돌려볼 수 있게 됩니다.


두번째 번형에는 버튼 대신 머리 속에 심을 수 있는 신경칩(neural implant)이 주어집니다(이런게 있다고 가정합니다. 어차피 사고실험이니까요). 이제 피험자는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이 그냥 생각만으로 컴퓨터에게 명령을 내려서 화면 속의 도형을 실제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상황(평범한 세팅, 조작 버튼, 신경칩)에서 각각 어디까지를 인지적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질문을 약간 바꿔서, 각 상황에는 얼마만큼의 인지(cognition)가 존재할까요? 저자는 세 상황이 모두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머리 안에 존재하는 것만 인지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신경칩은 분명 머리 안에 있으니 인지 과정으로 쳐야 합니다. 만약 이를 인정하면 그 신경칩이 머리 밖에 버튼 형태로 존재한다고 해서 그걸 인지 과정으로 보지 말아야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죠(일종의 미끄러운 비탈길 논증).


실제로 한 실험(On Distinguishing Epistemic from Pragmatic Action)에서는 테트리스 게임을 하는 피험자를 관찰하여 (위 주장과 호환되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테트리스를 할 때 블럭을 회전시키는 행동에는 사실 두 가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실제로 도형을 돌리기 위해서 돌리는 실제 행동(pragmatic action)이고, 다른 하나는 도형이 맞는지 보기 위해 돌리는 인식적 행동(epistemic action)라는 것이죠. 저자의 주장은 인식적 행동은 행동이라기보다 인지 과정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세상에는 단순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과정 자체도 존재하는 것이며, 인식적 행동이란 세상이 문제 풀이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세상에 변형을 가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3. 능동적 외재주의(Active Externalism)


위 논의를 기반으로 능동적 외재주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인간과 환경은 양방향으로 상호작용하는 단일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2) 이 때, 환경이 딱히 인간에 비해 더 수동적이라고 볼 이유가 없으며, 양쪽 모두 동등하게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아야 한다.


저 자의 주장에 의하면 능동적 외재주의 관점이 일상의 다양한 행동들을 더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설명의 경제성은 좋은 이론의 특징 중 하나죠). 예를 들어 Scrabble 게임(알파벳 조각을 가로세로로 맞추어 단어를 만들어내는 보드 게임)을 할 때, 자기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며 자기가 가진 알파벳 조각을 이리저리 재배열하고, 자기 순서가 왔을 때 특정 단어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인지적 프로세스가 일어난 것인지 설명하고자 할 때 "내적 인지 프로세스 및 일련의 긴 시각적 입력과 손의 움직임" 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타일의 재배열" 자체를 사고(즉, 인식적 행동)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것이죠. (국내에는 Scrabble 게임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리 좋은 비유가 아닐 것 같습니다. 초보자들이 포커를 하거나 원카드를 할 때 자기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이리저리 옮겨보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4. 인지에서 마음으로(From Cognition to Mind)

위 사례에서는 (좁은 의미의) 인지 과정에 환경이 능동적으로 관여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저자는 이제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마음에 대한 능동적 외재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또다른 사고 실험을 도입합니다.


오 토(Otto)와 잉가(Inga)라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철수와 영희 쯤으로 생각하면 되는 평범한 남자/여자 이름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이 있는데, 오토는 치매(Alzheimer's disease)에 걸려서 장기 기억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오토는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을 (수첩공주마냥) 수첩에 적어두고, 항시 수첩을 확인합니다.


두 사람 모두 새로 열긴 전시를 보러 전시관에 가고 싶어 합니다. 즉 동일한 욕구(desire)를 가지고 있습니다. 잉가는 전시관이 53번가에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53번가를 향해 갑니다. 즉 전시관이 53번가에 있다는 **믿음(belief)**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심리학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욕구와 믿음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한편 오토는? 오토는 수첩을 꺼내서 전시관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53번가를 향해 갑니다. 결국 잉가와 오토 모두 전시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잉가가 왜 저쪽으로 가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누구나 당연히 "잉가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이 저쪽에 있다고 믿으니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토가 왜 저쪽으로 가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첫번째는 잉가과 동일하게 "오토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이 저쪽에 있다고 믿으니까"라는 대답이고, 두번째는 "오토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의 위치가 수첩에 적혀 있다고 믿어서, 수첩을 확인해보니, 전시관에 저쪽에 있다고 적혀 있으니까"라는 대답입니다. 잉가와 오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도식화하면 이렇습니다:


* 잉가: 전시장에 가고 싶다 -> 전시장의 위치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 53번가로 이동


* 오토: 전시장에 가고 싶다 -> 전시장의 위치를 수첩에서 확인하고 -> 53번가로 이동


저 자가 이 사고 실험을 제안한 이유는 당연히 두번째 대답보다 첫번째 대답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오토가 수첩을 확인하는 행위를 구구절절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사실 잉가도 "전시장의 위치가 53번가"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working memory)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 기억에서 인출하는 과정이 필요했을텐데 아무도 이런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토의 경우 그 과정이 외재화(즉 수첩 읽기)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어지는데 이게 사실은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실험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수첩이 오토의 장기 기억이다"라는 비교적 뻔한 얘기가 아닙니다. 수첩에 담겨 있는 것은 오토의 믿음(belief)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외재화되어 있다는 것이죠.


어떤 정보가 그저 정보가 아닌 믿음으 로 작용하는 이유가 그 정보가 수행하는 역할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그 역할이 꼭 머리 속에서만 수행되어야 한다고 간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The moral is that when it comes to belief, there is nothing sacred about skull and skin. What makes some information count as a belief is the role it plays, and there is no reason why the relevant role can be played only from inside the body). 이건 사실 저자가 말하는  동등성의 원칙(parity principle)을 인지적 과정 뿐 아니라 믿음 등 의식적 경험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 등성의 원칙(parity principle)이란 이런 개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일부가 마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어떤 기능을 수행 한다면, 이를 인지적 과정의 일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If . . . a part of the world functions as a process which, were it to go on in the head, we would have no hesitation in accepting as part of the cognitive process, then that part of the world is (for that time) part of the cognitive process). (이 부분은 <The Extended Mind> 글에는 없고, 저자가 이후에 쓴 책인 <Supersizing the Mind>에서 발췌하였습니다)




5. 바깥 경계를 넘어서(Beyond the Outer Limits)


한편, 어떤 정보가 믿음이 되려면 다음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1. 해당 정보가 그 사람의 인생에 항상 관여하며 이를 정보를 참고해야하는 상황에서 참고하지 않고 행동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2. 참고하고 싶을 때 어려움 없이 언제든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


3. 일단 그 정보를 참고하면 이를 의심없이 수용한다.


4. 그 정보가 거기에 있는 이유는 과거 언젠가 한 번 그 내용을 신뢰해서 그곳에 그 정보를 수록했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가 이 네 가지(특히 앞의 세 가지가 중요) 특성을 두루 가지고 있으면 그 정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고, 오토의 수첩은 이를 모두 만족하기 때문에 확장된 믿음(extended belief)이라는 것입니다.


마 지막 부분에서는 사회적으로 확장된 인지(socially extended cognition), 자아(self)의 확장, 이러한 논의가 가지는 여러가지 함의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제가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요약을 생략하겠습니다.



출처 : http://alankang.tistory.com

꼭 들어갔다.

꼭 들어갔다. 프로그 디자인, 안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