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1. 20.

[BAZAAR] 조수용의 실험식당

디자이너들의 멘토인 ‘JOH’의 조수용이 논현동 후미진 골목에 작은 식당을 하나 냈다. ‘1호식은 우리에겐 건강하고도 멋스러운 한 끼 식사를 먹을 수 있는 식당조수용에게는삶과 일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실험실이다에디터/윤혜정




대한민국에서 가장 재미없는 골목이자 흔한 길을 꼽으라면단연 논현동 골목이다천편일률적인 다세대빌라주택편의점부동산세탁소,커피숍(카페가 아니다), 미용실유료주차장그리고 쇼윈도만 봐서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게들로구성된 동네이 길 초입에 소담스럽고 용감한 식당 하나가 생겼다오른쪽으로는부동산왼쪽으로는 세탁소앞으로는 가든식당을 두고 당당히골목의 명물로 자리 잡은 ‘1호식’. 요즘 알 만한 사람들이드나든다는 이 식당은 다름 아닌 조수용의 작품이다조수용은(어쩔수 없이 또 언급하자면프리챌을 거쳐 네이버(NHN)의전(크리에이티브 마케팅&디자인 본부장으로 브랜드 마케팅과 디자인을 총괄했던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이 화려한 경력과 함께 그는 현재 회사 ‘JOH &Company’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싶은 대표브랜드의 스토리를 매달 소개하는 <B> 매거진 발행인여기에‘1호식 사장님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된 거다점심 시간에 만난 조 사장님은규동을 먹으며 말했다. “일대에서 가장 건물세가 싼 곳을 알아보라고 했어요전 와보지도 않고 계약했고요. (웃음)” 쌈밥을 베어 물던 난 통 창을 통해 안을 기웃거리던 행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모르긴 해도그들의 눈에는 이8평 남짓한 식당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난 당신의 상상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1호식은 조수용의 첫 번째 식당이자 매일 먹는 좋은 식사의의미를 가진 공간이다. “먹는 걸 공부하고 연구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관심이 많아요직원들에게도 매일 먹고 싶은 걸 써 내라고 했는데의외로 규동이많이 나왔어요지금 판매되고 있는 메뉴들은 모두 이렇게 결정된 거예요.” 규동은 100% 현미밥 위에 쇠고기를 얹어서 서빙되는데고슬고슬한 현미밥에 부드러운 쇠고기를 입에 떠 넣을 때의 식감은 고소한 맛을 능가한다다양한 야채로 야무지게 만 쌈밥은 돼지고기 수육상큼한 파와 함께먹으면 일품이다삼치구이백반은 삼치의 고소한 풍미를 살려주는유자 드레싱과 해남 김막동 소금 명인이 생산한 토판염이 생선 요리가 가진 담백함을 최고로 끌어올린다여기에 치킨가라아케까지말하자면 소돼지생선이 골고루 포진한 균형 있는 밥상마치 최고의 이탈리아 요리나일식처럼 각자의 재료가 어떤 조미료나 과한 조리법 없이도 200%의 능력(맛과 영양)을 발휘하는그것도남이 정성스럽게 차려주는 밥상을 마주하는 것만큼 흥겨운일이 없다는 걸 난 오랜 타향살이와 사회생활로 이미 알고 있었다.

메뉴판에는 내 마음이 그대로 적혀 있다. ‘취향과는 무관하게 회사 주변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던 제이오에이치 식구들을 비롯한 인근 직장인과 맛은 물론이고건강까지 꼼꼼히 따져가며 외식 장소를 고르느라 고심하는 동네 주민들이 마음 편히 즐겁게 식사하고 때로는 시원한 맥주 한잔도 곁들일 수 있는 그런식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메뉴는 밥만큼이나 담백하다.‘마장동 우시장에서 직접 선별한 청정우냉장으로 10시간숙성한 쇠고기 업진살 130그램매일 아침 새로 우려내는가츠오부시 맛국물, 1호식만의 노하우로 만든 규동 육수와 참기름 드레싱신선한 파채와 기름 없이 볶아서 70퍼센트만 익힌 양파매일 다르게 준비하는 국과 두 가지 반찬찹쌀 40퍼센트를 섞은 현미밥 170그램.’알랭 드 보통은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가 마치 문학처럼 느껴진다고 했는데이 정도면 꽤괜찮은 시다. “건강하면서도 멋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어요. 1호식에서 밥 먹자하는 게 촌스러워 보이면 끝난다는 거죠그렇다고 유기농 이런 거 막 갖다 붙이면 오히려 맛없게 느껴지잖아요유기농을내세우지 않고 그냥 메뉴에 써놓았어요메뉴가 실제 우리 레시피예요.집에 가서 그대로 해 드셔도 되요.(웃음)”

속을 든든히 채우고서야 이 작은 공간이 놀랍도록짜임새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조수용은 주방의 사이즈냉장고에식자재를 저장할 수 있는 양그릇 개수까지 꼼꼼하게 계산해서 테이블 사이즈를 냈다고 말했다그러니까 식사를 담은 쟁반을 단순히 예뻐서 쓴 게 아니라는 거다모든물건이 제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가장 먼저 준 건 간판 옆에 앉아 있는 찰스 임스의 작품인 새 모양의 오브제였다.입구 옆에는<B> 매거진 1호로다뤄진 프라이탁 가방의 실험 장면이 담긴 페이지와 실제 그 실험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가방이 전시되어 있었다.아래에는 JOH가 만들어 곧 20가지 버전으로발전할 예정인 가방이 걸려 있었다낡은 치킨집이 어떻게 1호식으로변모했는지 알려주는 네 장의 사진도 눈에 띄었다그 중 물푸레나무로 만든 무지 의자와 이탈리아 조명회사인 아르테미데의 톨로메오의 존재는 특히 생경했다. “우리나라에는 가격이 저렴한 오리지널이 없어요다른 식당 하는분들이 보면 황당할 거예요사무실도 아니고식당 의자를왜 그 비싼 무지로 해하지만 이런 일 한다는 사람이 짝퉁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톨로메오도 조명을 냄비처럼 벽에없어 놓고 싶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고집했는데하면 할수록 우린 이걸로 해야 한다 싶더군요이건 사명이다사명(웃음).” 밥 먹는 데 무지든아르테미데든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꽤 중요한 지점이다적어도 이 식당에서는 단가가 6천원에 육박하는 삿포로 생맥주도, 100% 국내산 재료도음식 가격도모든 것이 가짜가 아닌 오리지널일 거라는 얘기니까.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레스토랑 혹은 식당은 로망이다디자인이 소통에 대한 거라면 음식인테리어 등은 물론메뉴판부터 손님을 대하는 방식과 오감에 이르기까지 소통을 전제한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을 구현할 수 있는곳이기 때문이다게다가 그것이 조수용의 식당이라면 기대는 더욱 커진다지난여름어느 자리에서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식당이 성공하게끔 하는 요건을 모두 제외한 식당을 차려볼까 해요소위명당별도의 마케팅잘 팔리는 메뉴 이런 걸 고려하지않은 곳 말이에요.” 그런 식당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난그걸 조수용의 실험식당이라 잠정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실제 1호식을 열 때 사내에 메일을 보내 마케팅은 절대 하지 않길당부했어요전 음식에 대해서는 마케팅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에요가격이든 퀄리티든 진짜라야승부가 나지어떤 유명세도 식당을 성공시킬 수는 없어요아무것도안 했더니오히려 나만 아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 재미있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나는 조수용이 무엇을 실험하였는지어떤 결과물을 얻고 있는지 궁금했다. “학교 다닐 때 하워드 슐츠가스타벅스에 대해 쓴 책을 보는데,딱 꽂히는 대목이 있었어요아메리카노를마시는 미국인들이 이탈리아에 가서 에스프레소 베이스 커피 음료를 마시는 걸 보고 자긴 너무 좋았다는 거예요. ‘내가좋아하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거다에 비전을 가졌다는 거죠마찬가지예요식당을 하시는 분들은 조미료를 좀 쓰더라도 맛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현미밥으로식사를 내면 손이 많이 가고 보기도 좋지 않다고 하죠하지만 전 그게 아니라고 믿었어요.집요하게 조미료를 쓰지 않으면서도 맛을 놓치지 않을 수 있고현미밥으로규동을 만들어도 나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한 거예요.” 1호식은 실험실이라는 내 말에 그가절반을 동의한 건 자신의 취향과 개성에 공감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곧 틈새시장의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고나머지 절반을 동의하지 않은 건 이건 실험이 아니라 상식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그의 발상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디자이너처럼 생각하지 않고 디자인하기 때문이다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네이버 사옥은세컨드 홈을 염두에 두고 지었고현재 JOH의 사무실은 일하고 싶은(그러니까 놀고 싶은사무실을 컨셉트로 했다가방은 본인의 사이즈에 맞게 본인이 들고 다니고 싶은 가방으로 만들었을 거고,<B> 매거진은 본인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브랜드를 소개하며, 1호식 역시 본인이먹고 싶은 메뉴를 판매하는 거다디자이너가 되어 디자인을 하고 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소비자가 되어 거꾸로’ 생각하는 것. “세상을 브랜드의 프리즘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브랜드를 그려놓고그 브랜드에 맞는 상황을 거꾸로 맞추는 거죠어떤 기업이든 조그만가게든 궁극적으로는 브랜드가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해요분식집을 차린다 치더라도 사람들에게 어떤 브랜드가될 것인가 고민한다면 특성도인테리어와 분위기도사격도나오거든요사실 우린 이미 그렇게 살고 있어요어디서밥을 먹든,옷을 하나 골라 입든음료수 하나를 편의점에서사 마시든, TV를 보든다 각자의 자기 브랜드가 있으니까요그렇게 보면 사람도 하나의 브랜드인 거예요.”

누군가에게 유의미한 브랜드가 되라고 생각을 설득하는것이 직업이었던 그는 이제 스스로 유의미한 브랜드가 되고자 한다누군가에게는 꿈의 직장이자 인생의목표일 수도 있는 네이버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손에 잡히는걸 하고 싶었죠전 제 삶에서 제가 실제 마지막 소비자로서 이 시장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감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어요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늘먹는 거입는 거자는 것그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했어요여기에 잡지 같은 정보와 가방 같은패션까지그것들이 저라는 인간의 삶의 구성요소이고 그건 끝까지 애정을 놓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그런데 인터넷은 어느 선 이상 몰입이 되지 않더라고요싫고 좋고를떠나 평생은 못하겠다는 느낌이랄까요?”



건강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1호식의 컨셉트는 내년 초 한남동에오픈 할 이탤리언 & 아메리칸 레스토랑 세컨드 키친(가제)’으로 확장될 예정이다. “이번에는레스토랑의 많은 공간을 할애해서 슈퍼마켓을 함께 해볼까 해요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토마토치즈달걀,루콜라같은 신선한 재료를 직접 사 갈 수도 있도록요바라건대돈많이 안 들이고도 좋은 와인을 가장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으로도 만들고 싶어요공연을 한다는 개념을넘어서 음악도 적극 끌어드릴 생각이에요그러니까 누군가가 장을 보러 왔는데 바에는 사람들이 모여있고공연도 하고 있고한참 음악 듣다가 치즈나 빵을 사 가지고 나갈수 있는 곳누구든 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저의 이상향 같은 곳이죠.좋은 공간이란 기억의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고디자이너나 건축가란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사건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는 우리가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 희한한 공간을 시작으로한남동의 지형을 바꾸어놓을 모종의 사건을 꾸미고 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한남동 일대를 2의 가로수길로 만들고의식주와 패션정보의 결정체인 호텔을 짓고 싶다는 그의 청사진을 함께 들여다봤다호텔의 존재 이유부터 슬리퍼까지완벽한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말을 들었을 때왜 그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는지 모르겠다. “전여유가 별로 없는 집에서 자랐어요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아들을 존중하는 걸로 표현하셨죠일 년에 한두 번 티셔츠 하나,바지 하나 살 때에도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등포 일대의 가게를 다 돌았어요그리고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뭘 사고 싶니어떤걸 사고 싶어요그리고 다시 가서 그 애를 사죠그게하루 일과였어요디자인교육이 아니라그냥 후회할까봐그러다 보니어린아이의 눈에도 브랜드의 흥망성쇠가 보였고디자인이나 브랜드에 대해 본능적으로 체득하게 된 것 같아요어머니가제게 정말 좋은 선물을 주신 거죠지금도 출장 가면 백화점을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다 훑어야 해요그래야 시원하거든요.(웃음)” 아이처럼웃는 조수용을 보니 그가 아무리 별난 사건을 벌인다 해도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겠다 싶다.










 j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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